모나리자의 눈 (글:후나코시 야스타케)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보면서 저 눈에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다른 그림에는 저런 눈은 없다. 저 눈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줄곧 오랫동안 신경이 쓰였었다.
 반짝 빛나는 눈, 말을 걸어오는 눈, 미소를 짓는 눈, 우수에 잠긴 눈, 천차만별의 눈이 있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눈은 그 중의 어느 것도 아니다. 그 눈은 모나리자에게만 있는 특별한 눈이다.  여기까지는 느끼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문득, 그 눈은 임신부의 눈이다 라고 퍼뜩 생각하게 되었다. 당돌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전철 안에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부인의 눈을 보았을때, 아니 이 눈은 어딘가에서 본 눈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 부인은 눈을 이쪽으로 향하고는 있지만 보고 있지는 않다. 시선이 밖을 향하고 있지만 밖을 보고 있지 않다. 그 시선은 그녀 자신의 내부로 향해 있다.
  눈이 몸 밖을 보는 것이 당연한데, 부인은 밖을 보고 있지 않다. 자기 몸 속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밖을 보는 눈과 내면을 보는 눈, 미묘한 일 같지만 누구라도 그것이라고 알수 있을 만큼 큰 차이인 것이다.
 그 부인은 자기 몸 속을 보고 있다. 태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태내에 꿈틀거리는 태아를 지켜보는 눈이었다.
 나는 그 부인이 임신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희고 투명한 피부에 약간 엷은 빛의 눈동자였다. 배가 불룩해져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묘하게 확신을 가졌다.
 그 부인이 일어섰을때, 나의 확신은 적중해 있었다. 신성한 공기가 부인을 감싸고 있다. 배가 살포시 불러 있었다.
 나는 빤히 그 부인을 쳐다본 것은 아니다. 미술가 특유의 수련으로 딴전을 피우는 척하고 관찰을 한 것이므로 결례가 되지는 않는다.
 이 부인의 눈에서 나는 모나리자의 눈의 비밀을 찾아냈다. 틀림없이 같은 눈매인 것이다.
 모나리자 눈의 불가사의를 이 때 나는 간신히 해결한 기분이 들었다.
 반짝 빛을 내며 뭔가를 향하는 눈이 아니다. 사색하는 눈도 아니다.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다. 오로지 한결같이 자기 몸 속의, 태내의,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지긋이 지켜보는 눈, 그 눈은 엄숙하리만큼 위엄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생명의 생육의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보는 고귀하고 정갈한 눈이었다.
 이 눈은 임신하고 있는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모나리자에 대해서 그 모나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에 의해 그려진 모나리자는 진정 임신부의 눈임에 틀림없다. 그림 속에서 앞에 놓인 손의 위치나 의상의 부푼 모양 등에 관해 사족을 달 필요는 없다.
 그 깊이 끌어들이는 듯한 눈은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태내로 향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뿐인 것이다.
 마음이 밖을 향하고 있는 눈과 내면으로 향해져 있는 눈은 분명히 대조적이다.
 모나리자에 대해 신비로운 미소라고 흔히들 만한다. 그건 그것으로, 그대로 형용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연한 계기로 모나리자와 임신을 결부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 눈 속에서는 임신부의 눈을 느낀다.
 미소라고 불리우는 그 눈은 아래 눈꺼풀의 아련한 부풀림과 입술 양끝의 약간의 악센트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눈썹 아래의 그늘은 미소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눈동자의 빛을 어둡게 억제한 것은 내면으로 시선을 끌어들이려는 수법일 것이다.
 나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 관해서 특별히 자세하게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모나리자 그림의 눈에 마음을 빼앗겼었으므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나의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불순한 견해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명수필] 중에서 (다락원)

일어공부도 할 겸 책을 들었다가 이 수필을 읽게 되었는데, 모나리자의 눈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 퍽 이채롭고 그럴듯하여 지나치기 아쉬운 마음에 이 곳에 옮겨본다.